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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6건)

《고봉집(高峯集)》 해제(解題) 2- 생애와 학문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고봉집(高峯集)》 해제1 -가계와 행력 등
1. 저자기대승(奇大升) : 정해년(1527, 중종22)~임신년(1572, 선조5).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2. 가계3. 행력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 11월 18일,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춘담문집春潭文集
기동준奇東準(1869~1918)의 『춘담집(춘담문집春潭文集』은 10권 5책 석인본으로 1966년 아들 奇近燮이 편찬했다. 詩(권1), 書(권2~6), 序(권7), 記(권8), 疏․銘․上樑文․祝文․祭文․碑(권9), 墓碣銘․墓誌銘․墓表․行狀․傳․附錄(권10)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없고 아들 近燮이 跋을 붙였다. 권1은 시집으로 265수의 작품
귀전암 歸全庵
광산구 광곡길 133 (광산동)광곡마을 입구의 칠송정 집 뒤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묘지가 있다. 더 올라가면 고봉이 수양하면서 공부하던 암자인 귀전암 터가 있다. 귀전암은 6대 종손 참의공 기언관奇彦觀이 1706년에 중수했으나 퇴락되었다.귀전암은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사단칠정四端七情
기효증(1550~1616)
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칠송정2 七松亭
광산구 광곡길 77 (광산동)   칠송정은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 (1551~1616)의 작은 정자이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
청음정 淸音亭
북구 용봉동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가는 언덕자락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의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청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의 거리에  만포처사(晩圃處士) 김재화(金在華)가 지었다. 아들은 김
죽취정 竹翠亭
북구 생룡동 (생룡마을)   광주패밀리랜드 건너 생룡마을 뒷산인 죽취산 기슭에 금성범씨 모정 범형식范瀅植(1872~ ?)의 죽취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죽취정은 그의 선묘가 있는 근처에 1895년 추모의 정자 성격을 띠었다. 그의 아들 범희채范熙埰가 중수하였다.주인 범형식은
우산정사 牛山精舍
북구 효령동 산102   효령동 종방마을 입구 도로변을 따라 향리 송은松隱 기정륜奇梃崙(1663~1740)이 학문을 가르치던 우산정사가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이 정사는 뒷편에 존성재라는 별도의 재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자로 여겨진다. 이곳은 강학이나 종친 모임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오산정1 梧山亭
북구 서하로 243 (오치동)   한말에 좌승지를 지낸 오산 이용헌이 오치의 산수를 사랑하여 오치동의 산 정상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송천 이계익이 1911년 부친의 뜻을 이어 이 정자를 오치의 안산案山에 완성하고 아버지의 호를 따 오산정이라 이름했다. 《
원풍정(願豊亭) 소해정(蘇海亭) 만주사당(晩洲祠堂) 경의재(景義齋 )
북구 소해로 11 (일곡동)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은 조선 시대 광주목 석제면에 속했고, 호구총수에 일곡촌(一谷村)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전통적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일신재나 그중에 구한말 일대의 선비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머물렀던 유서 갚은 곳이다. 원풍정(願豊亭)
기동석(奇東奭)
기동석(1875~1950)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국로(國老)이고 호는 회계(晦溪)이다.부 : 奇琮鉉조 : 奇榮國증조 : 奇象憲외조 : 竹山 安命和처부1 : 長興 高濟喬처부2 : 光山 盧文奎기동석은 작은아버지인 기주현(奇周鉉, 1846~1907)의 양자로 입적됐다. 묘는 광산구 임곡동 노동마을에 있다가 이장하여 촌곡면 종산마을에 있
기동준(奇東準)
기동준(1869~1918)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평중(平仲), 호는 춘담(春潭)으로 진사를 지냈다.부 : 奇昌鉉조 : 奇文國증조 : 奇象德외조 : 海州 崔煥潤처부1 : 長興 高濟斗1860년 11월 17일 奇大升의 후손인 昌鉉의 아들로 光州 廣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나 잦은 질병에 시달렸다. 평소 어
귀후재1- 기동준
광산구 광곡길 133에 위치해 있다. 고봉 기대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서당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한옥으로 건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귀후재기>에 따르면 고봉 기대승의 후손인 기동준이 세웠으며, 건립 시기를 1917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건축의 특징인 단조로움과 깔
봉산사 묘정비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사)봉산사 묘정비鳳山祠廟庭碑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의 건립 취지와 그 사당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다. 1976년에 묘정비를 세워 기록을 남겼다.전 성균관장 영가永嘉 권중해權重海가 글을 지었고 덕양德陽 기영
농은정2
서구 주월동농은정農隱亭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참판 농은農隱 이돈식李敦植(1847~1920)이 세웠고 춘담 기동준(1860~1918)의 기문과 현와 고광선(1855~1934)의 명문이 있다. 옛 광주은행 화정동지점과 보성보寶城堡 인근 주월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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